주석 1: 인간이 부정하는 문제
많은 사람은 인류의 동행자 상황 보고를 읽으면, 두려워질 것이다. 그들은 이 상황 보고가 마치 사실이고 진실한 것처럼 생각하고 읽을 것이므로, 물론 실제로 사실이기는 하지만,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이것을 부정하고 싶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인류의 동행자 내용이 당신의 약점을 드러낸다. 인류의 동행자 내용은 당신의 힘을 불러내고, 내재한 지혜를 불러내고, 내면에 있는 영적 마음인, 앎을 불러내지만, 동시에 당신의 약점을 드러내고, 당신의 취약성을 드러내며, 당신이 자신의 의식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리고 인류와 우주 사이의 경계가 무방비 상태라는 것을 드러내며, 당신의 가정과 편견, 우주의 삶에 대한 전반적인 당신의 무지를 드러낸다.
인류가 지구 밖에서 온 지적 생명체를 언젠가는 만날 것인지 여기서 자문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 일이 일어날 때, 인류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인류는 새로운 방문자들이 우호적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인류는 방문자들의 동기와 의식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인류가 그들의 조직, 그들이 쓰는 방법 등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만약 당신이 이 질문들을 진지하게 숙고해 보면, 당신에게 답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답이 없으니, 당신은 아마 두려워질지도 모른다. 당신은 자신이 취약하다고 느낄 것이고, 사람들이 이러한 만남에 얼마나 준비되지 않았는지 알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여전히 우주에 인류만 있고, 항상 인류만 있었고 앞으로도 항상 인류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므로, 대다수 사람은 이 중요한 질문들을 실제로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종종 이 문제를 생각해 본 사람들조차 우주의 삶에 대해 매우 낭만적으로 생각한다. 우주의 삶이 인류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 이 만남을 통해 인류가 얼마나 많은 것을 얻을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방문자들이 인류의 예술과 문화, 역사와 기질에 얼마나 관심을 가질지를 생각한다.
그래서 이 질문들을 중요하게 여기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소수의 사람조차 자주 낭만적으로 추측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우주의 삶이 자신들의 약점을 드러내므로, 우주의 삶을 현실로 마주하기를 두려워한다. 우리가 약점을 말할 때, 인류의 기술 부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가 말하는 약점은 인류의 인식 부족, 삶에서의 집중력 부족, 국가와 문화들의 사회 응집력 부족이다.
인류는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싸운다. 그래서 외부 세력에 취약하다. 하지만 실제로 인류의 취약성은 인류의 마음 상태와 관련이 있으므로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그 취약성은 당신이 자신이나 세상을 보는 관점과 관련이 있고, 가정하거나 환상을 품은 것, 사로잡혀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마치 거대한 폭풍이 형성되어 한동안 계속 커지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러다가 폭풍이 닥치면, 대단히 맹렬하게 몰아치고, 엄청난 충격으로 닥친다. 사람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을 당해 분노하고 두려워한다. 그렇지만 신호들은 이미 있었다.
심지어 인간 과학도 이제 이론적 확률로 우주에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류의 큰 첫 만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가 관심을 가질 것인가?
동행자 상황 보고가 전해지면, 온갖 부정, 비판, 거부가 있을 것이다. 왜 그러는가? 모든 사람이 실제로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하는 만남을 왜 그렇게 많이 거부하는가? 그렇지만 그 만남을 실제로 설명하면, “터무니없다! 말도 안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등 당신은 대단히 많은 부정을 볼 것이다. 당신은 과학자들이 “글쎄, 이동 거리와 속도 등의 한계를 고려하면 다른 종족이 지구에 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것이다.
얼마나 주제넘은 소리인가! 인간은 다른 나라와 문화가 오랜 시간에 걸쳐 발전시킬 수 있던 것을 감히 짐작할 수 있는가? 우주가 인간의 이해로 제한되어 있는가? 다른 종족이 기술에서 인간의 성취를 훨씬 뛰어넘을 수는 없는가?
당신은 아마도 “당연히 뛰어넘을 수 있지!”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 만남이 가능했을 때, 사람들은 바로 태도를 바꾼다. 그들의 이상주의는 사라지고, 그들은 자신의 낭만주의에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대단히 즐거운 기대감은 걱정과 불안으로 암담해진다.
그래서 인류의 동행자 메시지가 전해지면, 사람들은 두려움의 진짜 핵심인, 준비 부족, 자기 위치의 약점을 느끼기 시작한다. 동행자들은 우주의 삶을 매우 현실적인 관점에서 제시한다. 그들은 당신에게 있는 모든 질문에 답하려고 여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지금 세상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당신에게 알려 줄 뿐만 아니라, 인류가 다른 지적 생명체를 만날 가능성을 둘러싼 많은 비현실적인 추측을 불식하기 위해서도 여기 있다.
심지어 비현실적인 기대, 희망적인 기대조차 그 중심에는 실제로 두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불확실하고, 알지 못하며,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우주에 노출된 채 무방비 상태로 지구 표면에 살면서, 자신이 실제로 얼마나 취약한지를 정직하게 인지하는 순간에 깨닫기 때문이다.
당신이 지구를 방문하는 다른 종족이라고 치고, 단순히 인간의 행동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잠깐 생각해 보라. 참견하지 말고 그냥 관찰하라. 당신은 모든 것을 내려다볼 수 있다.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 인간의 활동, 인간의 개입, 인간의 갈등, 인간의 관계, 인간의 기술, 인간의 통신, 이 모든 것을 신중한 관찰자는 이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왜 두려워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접촉의 현실에 대한 두려움은 그 뿌리가 깊다. 많은 사람은 매우 미화된 관점, 즉 자신이 신의 창조물 가운데 정점에 있고, 자신의 종교가 아주 뛰어난 인간의 영성과 인간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다는 관점을 지니고 있다. 인류가 지적 생명체로 이루어진 큰 공동체에서 진화하는 작은 한 종족이라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이 종족이 실제로 광활한 창조물 안에서 매우 나약하고 분열되어 있고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이 가진 종교적 관점으로는 이런 인식을 받아들일 수 없다. 우주가 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지 않으며, 이 지구는 무수히 많은 은하계 가운데 한 은하계에 있는 대단하지 않은 별 주위를 도는 작은 행성에 불과하다는 과학적 발견으로 이런 관점 중 대부분은 이미 사라지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우월성은 어디에 있는가? 우주에서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누구에게, 혹은 어떤 것에 정말로 중요한가?
우리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당신이 불안의 핵심을 마주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기 내면에 있는 이 핵심을 직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수 없거나 하지 않으려 할 때, 우주에서 인류가 차지하는 위치와 지금 지구에서 일어나는 외계인 개입 현실에 관해 인간의 모든 무지와 억측이 생긴다.
사람들은, “이곳에 개입이 일어나다니, 말도 안 돼! 이것은 모두 어떤 사람들이 상상으로 지어내어 관심을 끌려고 하거나, 지루함을 달래려고 하는 뭐 그런 거야.”라고 말한다. 여기서 당신은 변명 말고 무엇을 듣겠는가?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진짜 불안을 느끼지 못하도록 자신을 달랜다.
만약 당신이 이것을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으면, “물론 언젠가는 방문이 있을 거야. 우주에 지적 생명체가 있다면, 저 밖의 누군가는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틀림없이 알게 되겠지.”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인류 과학의 한계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더 많은 가능성이 열린다.
만약 당신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으면, “물론 인류에게 접촉이 있을 것이다. 물론 지구 자원을 면밀히 조사할 것이고, 물론 지구를 평가할 것이다. 아마도 지구를 자기 조직의 일부로 삼으려는 다른 세력들이 우주에는 물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 아름다운 곳을 어떤 식으로든 현실적으로 이용하고 싶어 할 것이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이것을 추론이라고 한다면, 이 추론은 매우 합리적이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숙고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걱정이나 두려움 때문에 이것을 마주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우주 삶의 현실, 우주 삶과의 접촉, 개입 그 자체는 모두 지금 지구에서 가장 받아들여 지지 않는 현실이다. 사람들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에게는 직업이 있고, 가족이 있고, 일상의 내 문제들이 있다. 그런데 내가 왜 그것을 신경 써야 하는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지구에 개입이 일어나면, 그것이 당신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의 삶, 당신에게 일어날 일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이제 알겠는가? 이것이 바로 “고립주의 사고”이다. 인류의 동행자 보고서는 인류의 고립이 끝났다는 현실을 알려준다. 그러나 고립주의 사고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고 계속된다. 큰 공동체 세력을 직접 만나면 당신 삶이 어떤 식으로든 불안해지거나 혼란에 빠질 텐데, 이렇게 직접 만나지 않는 한, 당신은 자신이 항상 생각한 방식으로 계속 생각하고, 당신 삶과 운명을 형성하는 더 큰 현실은 안중에도 없는 채, 살면서 항상 가정하던 것에 기반을 두고 살아갈 것이다.
신이 어떻게 당신에게 다가와서 경계하고 주의하라고 말하고, 당신 삶과 운명을 바꾸는 이 큰 현실에 응답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자신이 물에 빠졌을 때, 저 밖에서 자기에게 구명구를 던져줄 신이 있다는 개념을 좋아하지만, 신이 그들 삶에 간섭하고 그들이 정말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보여줄 것이라는 개념이야말로 정말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바로 지금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큰 공동체 영성의 가르침이 세상에 있다. 왜냐하면 이 가르침이 이 큰 현실에 대해 인류에게 주의를 환기하고 인류를 준비시키는 신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만약 이렇게 인식하는 것으로 근본적인 불안과 두려움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오, 맙소사!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말하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전에 이것에 직접 대응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의 메시지는 사람들이 큰 공동체에 사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도록 이 인식과 함께 준비를 가져온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신이나 자기 삶, 이 세상에 영향을 직접 줄 큰 공동체 현실이 저 밖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 준비를 통해 당신은 더 큰 인식과 의식, 이 민감성을 얻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곧 갈아엎게 될 밭에 있는 개미 집단과 같다. 그리고 불쌍하게도 개미 집단은 곧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들이 멸망하는 순간까지, 삶은 항상 살던 대로 살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개미가 아니며, 당신에게는 의식이 있다. 당신은 미래를 숙고할 수 있고, 가시 영역 너머에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큰 공동체 안에 있는 지구 안팎 모두에서, 삶의 더 큰 무대 안에서 사는 자신을 생각할 수 있다.
이 큰 공동체 의식이 더 커짐에 따라, 당신은 지구가 훌륭한 특성을 지닌 매우 특별한 장소라는 것을 알기 시작한다. 그리고 “물론 다른 이들이 우리 행성에 관심을 둘 것이고, 우리에게 관심을 두는 것은 우리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이 지구를 지배하므로 이곳의 관리인이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당신은 여기서 당신 상황을 아주 매우 객관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관점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조차도 여전히 근본적인 이 두려움과 불안에 실제로 지배받고 있으며, 지구에 방문이 있고 개입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전반적으로 부정하면서 살고 있다. 그들은 심지어 이 사실을 고려하지도 않을 만큼 부정하는 상태에 있으며, 이 사실에 다가가지 않을 것이다. 정보와 증거가 도처에 널려 있지만, 그 근처에도 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오, 아니야. 아니야. 그것은 모두 어리석은 짓이고, 단지 불안한 사람들이 관심을 끌려는 것일 뿐이야.”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부정한다. 그들은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매우 비합리적이다. 그들은 자신의 무지와 다른 이들의 무지를 지지하고 강화한다. 그리고 개입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여전히 우주의 삶을 매우 경이롭고 낭만적인 여정으로 전망한다. 마치 가장 멋진 방식으로 꿈꾸는 것과 같다. “오, 우리는 선진 종족들을 만날 것이고, 이들이 우리에게 매우 많은 기술을 전해주고 평화롭게 사는 법 등을 가르쳐 줄 것이다.” 이것은 모두 어리석은 말이다. 그들은 저 바깥 우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이 합리적인 사람들이 큰 공동체 영성의 가르침이 제공하는 큰 공동체 관점을 얻으면, 깜짝 놀라며, 가장 깊은 곳에서 두려움과 불안을 느낀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이 얼마나 완전히 취약한지, 얼마나 무방비 상태인지, 얼마나 준비되지 않았는지 느낀다.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실마리를 찾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세상을 보면, 당신은, “세상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점령당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당신이 큰 공동체 영성의 준비를 받지 못했고, 이 인식을 지닌 곳이 어디에도 없다면, 당신은 의지할 곳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므로 압도당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인류가 아무것도 모르는 원주민 부족처럼, 다른 이들에게 점령되기만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다음으로 물론, 기술이 충분히 구원해 줄 것이라고 가정하는 문제가 있다. 이것이 세상에 있는 많은 문화에서 현대 종교가 되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이제 기술이 그들의 구원이라고 점점 더 믿는다. 문제가 있는가? 그럼 기술이 해결해 줄 것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는가? 그럼 기술이 그것을 극복하게 해줄 것이다. 우리가 준비되지 않은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가? 그럼 기술이 그 난국에 잘 대처할 것이다.
“우리는 마지막 한 시간을 남겨두고 우리의 기술로 그 난국을 타개할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간에 기술이, 인간의 창의력이 들어간 기술이 당신을 구해 줄 것이라는 믿음에 아무런 의심이 없다. 그리고 아무리 압도적인 상황이라 할지라도, 창의력과 기술이 합쳐져서 마지막 순간에 이겨낼 것이라고 믿는다.
이 모든 것이 부정의 일부라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희망 사항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큰 공동체와 관련하여, 이것은 정말 희망 사항이다. 당신은 큰 공동체 세력들이 자신들을 위해 지구를 차지하려고 여기 있는 것에 대해 인류가 기술적인 해답을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 세력들이 이곳에 있으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인류가 대응할 수 있는 것은 기술 수준에 있지 않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려줄 수 있다. 기술적으로 인류보다 아마도 천 년은 앞선 종족과 마주하고 있는데, 당신은 앞으로 몇 년 안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답은 기술 수준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 보라. 답은 마음과 의식의 수준에서 나올 것이다. 지금 지구에 개입하는 이들은 지구 자원을 보존하고 여기서 노동력으로 인간을 보존하는 데 매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들은 이것을 성취하는 데 기술만을 이용할 수 없다.
물론 그들의 기술은 그들이 데려가 조사하고 싶은 누군가를 무력화하는 데 유용하다. 하지만 만약 지구에 그들의 기술을 강압적으로 사용한다면, 그들은 지구 자원을 파괴하고 이곳의 인간을 파괴할 것이므로,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당신이 대응할 수 있는 바로 그 수단을 써야 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는 다시 두려움과 마주한다. 왜냐하면 기술이 없고, 기술이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이 없고, 인간의 이성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면, 사람들은 자신이 다시 이 취약한 곳으로 돌아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이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가 이들이 있는 것에 대항하고 큰 공동체에서 인류 자체를 강화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의 수준이 아니다. 이성은 기술이 발전하고 특정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는 더 깊은 인식이 필요할 것이다.
결국 이성적으로 아주 뛰어난 사람 중 일부는 개입을 완전히 부정하고 우주의 삶을 먼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글쎄, 그들이 그렇게 똑똑하고 박식하다면, 지금 세상에 있는 개입자들을 왜 느끼지 못하는가? 왜 그들은 이것을 가능성으로 받아들여 증거를 검토해 보지 않고 즉각 무시하는가? 사람들이 그렇게 똑똑하다면, 어떻게 그렇게 어리석을 수 있는가?”라고 궁금해한다.
이것은 무지하고는 다르다. 무지는 정보와 관점을 얻음으로써 상쇄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무지가 아니라, 오만이다. 우주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안다는 가정이다. 맙소사! 우주의 삶이 어떤 것인지 인류가 안다고? 세상에! 인류는 우주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려면 한참 멀었다. 알다니, 어처구니없는 말이다.
기술을 인류 구원의 원천으로 근거 없이 믿는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기술이 더 좋아지면 더 나은 구원이 오리라 생각한다. 그들은 기술적으로 진보한 종족들은 이기주의, 다툼, 속임수를 벗어날 만큼 진화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기술적으로 진보한 종족들은 충돌이 없으며, 인류가 여전히 직면하는 고질적인 문제들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정말 터무니없는 추정이다. 오늘날 인류는 100년 전 조상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기술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당신은 이 문제들을 스스로 극복했는가?
그러므로 답을 얻기 위해 전문가에게 의존하지 말라. 당신은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전문가들은 모를 수도 있고 알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도 당신과 같은 인간이고, 기꺼이 마주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과 불안에 대한 그들만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어떤 면에서, 개입은 인류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도전적인 일이다. 여기서 인류에게 있는 장애나 약점의 일부분은 삶을 실제로 이해한다고 억측하는 것이다. 우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실제로 알고, 누가 여행할 수 있고 누가 여행할 수 없는지, 다른 행성에 도착하려면 얼마나 걸리는지를 안다고 억측하는 것이다. 인류는 인간의 이해가 우주를 모두 이해하는 기준이 된다고 가정한다. 이것은 인간의 오만이며, 이 오만이 인간의 무지를 키우고 강화한다.
우주의 삶이 도전적이고 어렵고 경쟁적이라는 것은 큰 공동체 영성의 가르침에서 전하고, 인류의 동행자가 보낸 메시지에서 아주 거리낌 없이 전한다. 만약 당신이 우주의 삶에 낭만적으로 접근하거나, 그 삶을 완전히 부정한다면, 큰 위험을 떠안아야 한다.
여기서 정말로 일어나야 할 것은 인간의 인식과 학습에 완전히 새로운 전환이다. 이것은 마치 당신이 이 거대한 문턱에 도달하여 완전히 새로운 이해의 틀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다. 단순히 과거의 이해를 바탕으로 인간의 인식에 다른 특성이나 다른 차원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당신은 실제로 일종의 도약을 해내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이해가 여전히 인류 중심의 우주관에 기반을 두고서, 모든 것의 중심에 인류가 있고, 인류의 가치관과 이상에 따라 우주의 삶이 돌아간다고 아무 의심 없이 믿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은 여전히 신은 가장 중요한 창조물인 인간에게 주로 관심이 있고 다른 모든 것은 이 거대한 인간 드라마의 배경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지구의 종교들을 보라. 그 종교들은 정말로 큰 공동체 현실을 다룰 준비가 되어 있는가?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다. 지난 500년 동안 지구 수많은 곳에서 원주민 부족이 정복당하고 그들 문화가 흡수되고 파괴되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그 원주민들에게는 그들의 종교가 있고, 그 종교는 매우 광범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종교는 보통 그들 국경 너머에 있는 인간 삶의 현실을 포함하지 않으므로, 그들은 매우 취약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실제로 개입에 직면할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큰 공동체와 비교해 볼 때, 이 지구에 있는 인류 거류지는 정글에 있는 작은 마을과 같다. 이익을 얻으려고 이 마을에 찾아오는 세력들과 맞닥뜨렸을 때, 이 마을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아주 흥미롭게도 이 마을은 실제로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제일 먼저 할 수 있는 것은 개입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두려움과 불안을 직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얼마나 준비가 안 되어 있는지, 얼마나 취약한지, 심지어 방문자들이 여기 와 있는 것이 당신에게 이롭다고 생각하고 믿도록 설득당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알아야 한다. 이것이 첫 문턱이며, 불행히도 많은 사람이 이 문턱을 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물러서거나 부정하거나 모든 문제를 매우 선호하는 관점으로 볼 것이다. 첫 문턱은 자신의 상황을 인식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개입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일어날 것임을 당신은 안다.
흥미로운 일로, 사람들에게는 우주 지적 생명체나 선진 기술에 대해, 또 주위를 떠도는 이타적인 다른 종족들에 대해 거창한 개념들이 있는데,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 비슷하지만 더 강력한 이들과 만나는 것이다. 사람들이 지구 밖에서 온 지적 생명체를 만날 가능성에서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형태는 다르겠지만 그들 자신을 만날까 봐 두려워한다.
방문자들은 아마도 외모가 다를 것이고 다른 언어와 다른 의사전달 수단을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심지어 아무도 말할 수 없는 것, 특히 개화된 사회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만나는 현실이다.
이것은 방문자들이 인간이라거나 지적 생명체가 인간의 이상과 믿음에 따라 활동한다고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정말로 당신에게 말하려는 것, 당신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당신과 똑같이 필요한 것들에 쫓기는 존재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 지역 큰 공동체 삶은 매우 경쟁적인 환경이다. 당신은 지구에서 이 경쟁을 볼 수 있고, 자연계에서도 볼 수 있으며, 식물과 동물 수준에서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큰 공동체는 당신이 이해할 수조차 없는 규모의 경쟁 환경이다. 이 말은 그 환경에 있는 모든 이들, 특히 무역과 상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들은 자원을 찾아야 하고, 다른 국가들과 동맹을 맺어야 하며, 종종 그 국가들과 동맹을 맺기 위해 그 국가들을 설득해야 한다는 뜻이다.
기술 때문에 자원은 끝없이 필요하다. 기술이 삶에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모두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그것은 당신에게도 그렇고, 우주에 있는 그 누구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기술은 특정 기본 활동에서 당신을 자유롭게 해주지만, 더 복잡하게 만든다. 당신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나가서 사냥이나 낚시를 하거나 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을지 모르지만, 일하러 가야 한다. 당신이 먹을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 훨씬 더 복잡한 삶을 유지해야 한다.
기술로 인해 당신은 사냥이나 채집에서 벗어나고 기본적인 농업에서 벗어났지만, 자원의 필요성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사실, 기술은 당신 삶을 더 복잡하고 더 흥미롭게 만들었지만, 다른 면에서는 더 어렵고 더 스트레스를 받게 했다.
그것은 우주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나 모두 먹어야 하고, 자신이 창출한 것을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기초 자원을 놓고 겨루거나 경쟁할 수 있는 다른 형태의 지적 생명체를 상대해야 한다. 우주의 선진국은 많은 자원이 필요하지 않다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국가나 조직이 더 커질수록, 구성원의 개인적 자유를 더 제한할 것이고, 질서와 순응이 점점 더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우주에서 정말 자유 국가들은 작고 고립되어 있다. 그들의 기술은 그들에게 이점을 주었지만, 그들은 그 기술을 보호하고 숨겨야 한다.
당신이 십억 원을 벌어서 그 십억을 들고 시장에 나가는 것과 같다. 참으로 예상치 못한 충격일 것이다. 이제 모두 당신의 친구가 된다. 이제 모두 자신들이 하는 일이나 계획에 투자하도록 당신을 초대하고 싶어 하거나, 그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으므로 당신의 재정적 도움이 필요하다.
만약 인류가 국경을 넘어 여행할 수 있고, 인류의 큰 동기와 계획을 우주로 가져갈 수 있다면, 그것은 힘없는 주부가 십억을 들고 시장에 나가는 것과 같다. 그러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부정되는 삶의 현실은 반드시 직시해야 한다. 당신은 우주에서 누구를 만날 것인가? 당신은 당신 같은 다른 이들을 만날 것이다. 당신과 정확히 똑같지는 않다. 당신처럼 생기거나, 당신처럼 말하거나, 당신처럼 옷을 입지는 않지만,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 그들에게도 똑같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주에서 자원을 탐사하는 이들은 영적으로 깨달은 이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널리 퍼져 있는 많은 가정과 믿음, 환상과 신화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이 상황을 직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상황을 직시할 수 없으면, 그 상황이 당신을 압도할 것이다.
사람들은 안내와 힘, 용기, 평화를 달라고 신에게 기도하고, 신은 준비책으로 큰 공동체 영성을 보낸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것이 무엇인가? 나는 이것을 요청하지 않았다! 내가 이것으로 무엇을 하겠는가? 이것은 관련이 없다!”라고 말한다. 당신은 무엇이 관련이 있는지 모른다. 당신이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중요할지 모르지만, 미래에 당신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지 못할 것이다.
우주 지적 생명체와 인류의 만남은 인간의 우주여행, 인간의 과학, 인간의 철학, 인간의 종교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만남은 개입의 결과이며, 다른 종족들이 자신들을 위해 지구를 보존하려고 이곳에 온 결과이다. 그들은 인류가 서로 싸워 지구를 파괴하고, 지구의 귀중한 자원을 파괴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을 생각해 보라. 이것이 사람들의 반응이다. 예를 들어, 지구 선진국들이 정글 깊숙한 곳에서 작은 부족을 발견했는데, 금이나 다른 광물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거나 귀중한 목재로 가득한 거대한 숲속에서 살고 있다면, 당신은 그 선진국들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특히 원주민들이 이 자원들을 낭비할 것이라고 여긴다면, 혹은 햇빛을 좋아하거나 식량을 직접 재배하고 싶어 나무를 모두 베어내고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세계 각국은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자원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면서 그곳에 있을 것이다. 인간 국가는 그렇게 할 것이다. 원주민들이 자신이 지닌 것을 파괴하거나 방치하도록 내버려둔 채 그 국가들이 앉아만 있을 것이라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물론 아니다. 그 땅이 강대국들에 아무런 가치가 없다면, 당연히 원주민들이 그곳에서 살도록 해주겠지만, 대량의 금을 지니고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우주에서 지구를 방문하는 다른 이들은 지구를 그렇게 본다. 그들은 인류가 지구 천연자원을 파괴하고 자연의 법칙을 어기며 이 소중한 작은 지구를 파괴한다고 본다. 당신은 이렇게 했을 때 개입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연히, 그들은 여기에 와서 있을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할 것이고, 우리 국가들, 정부들은 협상을 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맙소사! 농담하는가? 허락을 구하기보다는, 개입 종족들은 개입과 통합의 계획을 세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 노동력을 보존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구에서 살 수 없으므로 인간에게 모든 일을 하게 할 것이다. 지구에서 일어난 것처럼, 원주민에게 금을 채굴하게 한다. 당신은 원주민의 허락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어쩌면 허락하도록 유도할 방법을 찾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할 것이다. 지금 지구의 상황에서, 인류가 그들을 막지 않는 한, 방문자들은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인류가 그들을 막을 방법은 단순히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과 영리한 계책이고, 인간 가족의 협력이다.
개입에 대응하는 첫 단계는 인식이지만, 사람들의 두려움이나 불안, 실패한 이상주의 때문에 인식은 정말 큰 문턱이다. 당신은 자신의 두려움을 마주할 수 있는가? 자신의 취약함을 마주할 수 있는가? 만약 당신이 조금이라도 생각을 해보았다면, 상황을 실제로 잘못 평가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그래, 우리는 인식했다. 이제 다음은 무엇인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 그들은 그 인식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
다음 단계는 당신이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큰 공동체 관점을 생각해 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인류가 이 자원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것이 바로 미래에 인류의 자유를 보존하는 일이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인류가 지구 자원을 파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만약 인류가 스스로 살아갈 능력을 잃고 선진 기술뿐만 아니라 기초 자원까지 외세에 의존하게 된다면, 인류는 자유를 잃을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오, 나는 그것을 믿지 않아. 우리는 자유를 잃지 않을 거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당신은 자유를 잃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공공연하게든, 미묘하게든, 당신은 우주 다른 종족들에게 의존하게 될 것이고, 그들이 계약 조건을 정할 것이고, 지구를 통제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인류가 혁명을 일으키기를 원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통제받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지구를 통제하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일어나는 개입은 매우 교활하며, 시간을 두고 매우 신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만약 그들이 무력으로 이곳에 온다면, 모든 사람이 반발하여 엄청난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지구 자원이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다. 개입 세력들을 기꺼이 돕거나 도울 수 있는 노동력이 여기에 없을 것이고, 전체 계획은 엉망이 될 것이다.
당신에게 큰 공동체의 관점이 있어야 한다. 당신은 이 지구에 사는 인간이다. 이 지구는 무방비 상태이다. 지구는 가치가 있으며, 다른 종족들이 차지하려고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종족들의 개입이 증가할 것이다. 당신은 국경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당신은 누가 여기 있는지, 왜 그들이 여기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는가? 이렇게 알아내는 일이 비밀 단체와 비밀 정부의 특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인류는 성장해야 하고, 유치한 자기 집착에서 벗어나야 하며, 자신과 삶에 대해 청년기의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적이 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개입은 계속될 것이고, 외계 세력들이 점차 지구를 지배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불평하고 항의하고 분노한다면, 어디로 갈 것인가? 이러한 이유로, 인식하고 큰 공동체 관점을 지니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다음 단계를 밟을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셋째 단계는 정신 환경을 배우는 것이다. 정신 환경은 영향력의 영역이다. 사람들은 정신 환경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지만, 정신 환경은 큰 공동체 상호작용에서는 매우 중요하며, 특히 서로 경쟁하는 종족이나 조직 사이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들은 다른 이들이 무엇을 할 것인지 알아보고 미묘한 방식으로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이것은 기술을 통해서 일어나기보다는 의식과 인식, 생각의 투사, 교묘한 활동을 통해 일어난다.
경쟁자들은 일반적으로 동일한 기술을 함께 쓰므로, 기술은 이점이 되지 않는다. 이점은 교묘한 계책과 설득력이다. 당신은 여전히 고립된 채 살고 있고, 우주가 인간이 정한 원칙에 지배받는다고 생각하므로, 아직 이것을 볼 수 없다. 당신은 이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에게 이러한 기량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당신은 두려움을 느끼고 취약함을 느낀다. 그래서 준비의 셋째 단계는 정신 환경에서 기량을 키우는 것이다. 당신은 실제로 이 기량을 키우는 법을 배울 수 있지만, 시작하려면 당신은 자각해야 하고, 큰 공동체 관점이 있어야 한다.
넷째로 계속 길러야 하는 것이 앎이다. 앎이란 무엇인가? 앎을 말할 때, 우리는 관점이나 정보체, 자료 더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는 능력, 즉 속임수나 외모 너머에 있고, 개인적 선호나 두려움, 부정 너머에 있는 아는 능력을 말한다.
개입은 거의 50년 동안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그러니 이제 UFO 현상을 연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떤 것을 아는가, 아니면 여전히 자료를 수집하고 있는가? “글쎄, 우리는 어떤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싶지 않다. 이것은 너무 복잡해서 우리가 이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가? 부정하는 것인가? 결론을 내리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는 뜻인가? 아니면 단순히 그 사람들이 모른다는 것인가? 그들은 이것이 실제로 무엇인지 보고 느낄 수 없는가? 50년이 지났는데도, 이것이 실제로 무엇인지 보고 느낄 수 없다는 말인가? 증거가 더 필요하다고? 맙소사! 얼마나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한가? 그 증거를 위해 50년이 필요한가? 100년이 필요한가? 증거를 50년 더 찾으면, 그때는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내릴 결론은 너무나도 뻔할 것이다.
이는 마치 결혼하지 말았어야 할 상대와 30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한 사람이 과거 어느 시점에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닫는 데 30년이 걸린 것과 같다. 그 사람은 정말로 자신의 깊은 느낌을 따랐어야 했으며, 상대방과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지난 30년 동안 이 결혼을 괜찮은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앎이 없으면, 당신은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알기를 원하는 것만 알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생각하기를 원하는 것, 즉 당신 부모나 문화, 사회 집단, 정부, 큰 공동체 등이 원하는 것만 당신은 생각할 것이다. 당신은 기본적으로 소떼와 같을 것이고, 이 목초지에서 저 목초지로 이끌려 다닐 것이다.
앎이 없으면, 정신 환경이 당신을 압도하고 어찌할 수 없게 만든다. 앎은 당신 내면에 있는 깊은 영적 마음이다. 앎은 정신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 당신의 유일한 부분이다. 앎은 속임수와 조종에서 자유로운 당신의 유일한 부분이다.
당신은 자신을 위해 자유를 원하는가? 그러면 당신은 앎길을 배워야 한다. 앎길이 자유가 아니면 무엇이 자유인가? 더 많은 돈을 갖는 것? 일은 적게 하고 돈은 더 많이 버는 것? 그것이 자유인가? 자유가 없는 부자들을 보라. 그들에게는 많은 돈이 있고, 그들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일할 필요조차 없다. 그들은 자유로운가? 아니면 그들은 자신의 돈과 상황, 특권, 욕망, 두려움의 노예인가?
인류의 동행자 보고서에 있는 메시지는 자유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자유를 얻으려면 개입을 알아차려야 한다. 당신은 큰 공동체의 관점을 지녀야 하고, 정신 환경과 그것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을 배워야 하며, 앎을 더 많이 체험해야 한다. 이 모든 일에서 기술이 작은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많은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
앎길을 배우는 것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단지 직관력을 기르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적절하지 않다. 당신은 실제로 자기 내면에 있는 아는 마음과 연결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연결을 하고 싶지 않거나 할 수 없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가 세상의 흐름을 바꾸고, 큰 공동체 인식을 키우고, 지구 주변에 경계를 세우기 시작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이 연결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지구와 같은 행성을 점령하려면 무력을 사용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개입은 미묘해야 하고, 현혹해야 하며, 확산할 수 있어야 한다. 난폭한 무력은 사용할 수 없다. 이 점은 인류에게 좋다. 인류는 난폭한 무력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방문자들, 당신이 설혹 이들을 이렇게 부를 수 있다면, 이 방문자들에게 난폭한 무력은 의미 없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들이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다.
창조주는 큰 공동체 영성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으로 인류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에, 필요한 것으로 거의 인식되지도 않은 필요한 것에 응답했다. 이 가르침은 큰 공동체 삶의 현실을 내포하고 있다. 이전에는 이런 가르침이 필요하지 않아 세상에 이런 가르침이 전해진 적이 없다.
어느 정도 앎길을 강조하는 영적 가르침은 많다. 그러나 큰 공동체 앎길은 지금까지 세상에 전해진 적이 없다. 하지만 이제 당신은 이 큰 공동체 앎길이 필요하다. 이 앎길은 세상에 있는 종교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종교들에 더 큰 범위, 더 큰 관점을 주고, 그 종교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존재하고 진화할 수 있는 더 큰 맥락을 준다.
그런데도 세계 종교 지도자들이 아마도 큰 공동체 영성을 배우는 데 가장 저항할 것이라는 점이 기이하다. 자신의 종교와 권위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어쩌면 큰 공동체에서 자신의 종교에 미래를 가져다줄 바로 그것을 부정할지도 모른다.
인간의 자유가 없다면, 미래가 없다. 인간의 자결권이 없다면, 미래가 없다. 그리고 큰 공동체를 이해할 수 없다면, 여기에 있는 누구에게도 미래가 없으며, 당신이 어떻게든 수용할 수 있는 미래란 없다.
당신은 이것이 당신 자신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신이 삶에서 원하는 모든 것, 되고 싶고 하고 싶고 갖고 싶은 모든 것을 개입자들이 모두 빼앗아 갈 수 있다. 당신은 상관없다고 말하면서, 아무 생각없이 개인적 목표를 추구하며, 다른 모든 것은 어찌 되든 상관하지 않을 것인가?
개입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지구의 천연자원이 고갈하고 세계 인구가 증가하면, 어쨌든 당신이 이용할 수 있는 것이 변할 것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러 갈 것이고, 다른 것은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메뚜기와 같다. 대지에 도달하게 되면, 메뚜기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먹어 치울 것이다. 그리고 황폐해진 곳을 떠나 이동할 곳이 없을 때까지 계속 이동하다가 모두 죽을 것이다. 이것이 인류 발전으로 기대하는 것인가? 숙주를 파괴하는 기생충처럼 숙주가 죽으면 그 기생충들도 모두 함께 죽는 것 아닌가?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은 “물론 아니지! 절대 아니야!”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이 이기적이라면, 이것은 적절한 비유이다. 흥미롭게도, 지구에 개입하는 이들의 눈에는 인류가 이 멋진 곳을 파괴할 일종의 파괴 세력으로 보인다. “우리가 거기 가서 인류를 막을 것이다. 인류가 지구를 제대로 이용하지도 보존하지도 못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지구를 보존할 것이다. 인류는 우리를 위해 일할 수 있다.” 이것이 그들의 태도이다.
이것이 정확히 그들이 생각하는 방식이고, 그들의 관점이다. 당신이 그들의 입장이라면 당신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인류의 위대한 이상주의에도 불구하고, 당신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이곳을 파괴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여기에서 이득을 볼 수 없다면, 우리가 이득을 볼 것이다!” 이것이 정확히 인간 정부가 대응하는 방식이 될 것이고, 아마도 당신도 개인적으로 이렇게 대응할 것이다.
개입하는 이들은 사악하지 않다. 그들은 단지 어떤 관점에서만 상황을 본다. 그들은 앎이나 영성에 인도받지 않는다. 인도받는다면, 이곳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지구에는 개입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곳에 있는 외계 종족이 자멸하는 인류를 구해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외계 종족과 같은 관점을 믿는다. 때로는 그들이 스스로 이런 결론에 도달하며, 때로는 개입을 통해 이 생각이 조장된다. 그렇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바로 인간의 자유와 자결권을 상실하는 것이며, 그 상실은 매우 철저할 것이다. 당신이 이것을 생각해 보면, 이것이 당신에게 최악의 시나리오임을 깨달을 것이다.
그래서 창조주가 큰 공동체를 대비하는 준비를 제공한다. 그래서 큰 공동체를 배우고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래서 큰 공동체 인식을 지녀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두려움과 불안을 직시하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주에서 자신들이 어디에 서 있는지 새롭게 이해해야 하며, 이 지구의 원주민이자 관리자로서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새롭게 이해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기 삶의 터전을 보존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또 집단으로 지닌 힘을 발휘해야 한다.
향상하는 인간의 자유와 이해와 협력을 보호하기 위해 신이 인류에게 준 것을 당신이 깨달으려면, 당신의 영적 이해가 바뀌어야 한다. 우주에서는 이것들을 지켜야 한다. 당신이 상황을 명확하게 보려면, 당신의 환상과 이상에서 벗어나야 하고, 심지어 요구하고 기대하는 것도 없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창조주는 인류의 동행자에게 관찰자가 되어 상황을 알려주고 메시지를 전달하라고 요청했다. 그리하여 인류가 큰 공동체 관점을 점차 지닐 수 있게 하였다.
신은 정신 환경과 앎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다. 앎길을 배우는 것은 각자에게 개인적으로 영적 여정이다. 앎은 당신 내면에 있는 큰 지성이다. 앎은 큰 공동체를 어떻게 상대하는지 안다. 앎은 인간의 믿음이나 가정, 선입견, 기만, 이상, 야망에 지배받지 않는다. 앎은 순수하고, 당신의 성스러운 부분이다. 앎은 안다.
마음은 생각하고, 앎은 안다. 이 둘 사이의 간극은 커 보이지만, 이 둘은 통합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당신 영적 성장에 궁극적인 목표이다. 이 큰 공동체 영성이라는 선물은 인간의 자유에 진정한 기반을 제공하게 되어 있으며, 개개인에게 권한을 주고 무리에게 권한을 주고 인류에게 권한을 주게 되어 있다. 인류는 지금 세상에 개입하는 이들에게 매일 힘을 잃고 있다.
우리는 이 메시지가 명확하게 알려주기를 바라지만, 이것은 사실 첫 단계일 뿐이다. 당신이 이 메시지를 읽거나 인류의 동행자 보고서를 읽고, “이제 나는 이해했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겠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은 아직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이해하기 시작할 수도 있다. 만약 이것이 당신 내면에 있는 어떤 것을 깊이 자극한다면,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은 활성화될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배워야 할 것이 많다.
이 지구 밖 삶의 현실과 인류의 만남은 아마 인류가 지금까지 마주한 것 가운데 가장 큰 문턱인, 새로운 문턱이다. 빠르게 배워야 할 것이다. 이미 알거나 이해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은 모른다. 아이디어가 있을 수도 있고, 이 메시지와 공명을 느낄 수도 있으며, 이 메시지가 중요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당신은 여전히 훈련하고 준비해야 한다.
산을 좋아한다고 해서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에 오르지는 않는다. 등산화가 있다고 해서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에 오르지는 않는다. 당신은 훈련하고 준비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산을 오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사는 시대의 도전이자 중대함이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자신의 위대함을 발견할 곳이다. 개인적 추구에는 위대함이 없으므로 당신은 거기에서 자신의 위대함을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세상에 정말로 필요한 것에 응답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 내면에 있는 부름에 응답할 때만, 자신의 위대함을 발견할 것이다. 당신이 응답할 수 있다면, 지금이 바로 당신 내면에 있는 위대함을 이끌어낼 좋은 상황이다.